(참고한 레시피는 맨 아래에 있어요)
저놈의 당근을 어떻게 해버려지.
몇 달 전부터 김치 냉장고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당근이 계속 눈에 밟혔다. 당근은 씻어서 먹어도 되는 채소니까 유기농이 좋을 거라고 생각하고 큰맘 먹고 산거였다. 제주도 구좌에서 자란 제철 유기농 흙당근 5kg. 보관만 잘하면 오래 두고 먹을 수 있다고 해서 비싼 돈을 주고 샀었다. 그런데 보관은 쉽지 않았다. 키친타올로 싼 후 비닐백에 넣으래서 그렇게 했더니 키친타월이 자꾸 젖었다. 진공 밀폐시켜 김치냉장고에 넣으면 더 좋다고 해서 그렇게 했더니 당근에서 나오는 수분 때문에 밀폐가 되지 않고 물기가 생겼다. 처음에는 금방 먹을 거니까 괜찮다고 생각했는데, 매일 당근을 먹는 건 작심해야 되는 일이었다. 그래도 야금야금 당근을 먹었고, 어느 순간부터 당근 맛이 이상해지기 시작했다. 원래 당근맛이 이런 맛이었던가? 갸우뚱하며 당근을 먹었다. 그리고 당근을 산 지 거의 4달이 되어서야 나는 남아있는 당근을 몽땅 꺼냈다.
이 당근으로 라페를 만들어야겠다고 벼르고 있었다. 라페는 프랑스어로 ‘강판이나 채칼에 갈다, 채치다’는 뜻으로, 당근 라페는 당근을 잘게 썰어 소스에 절인 샐러드이다. 당근을 몽땅 처분하기 좋은 요리였다. 레시피도 정말 쉬웠다. 당근을 씻어서 썰거나 강판에 간 뒤 올리브오일과 레몬즙, 홀그레인머스타드, 소금을 넣어 버무리면 끝이다. 며칠 두고 먹을 거라면 당근을 양념에 버무리기 전에 소금으로 절이면 된다. 마침 집에 모든 재료가 있었다.
당근 6개를 꺼내 키친타월을 벗기자 흙이 묻은 바짝 마른 당근이 드러났다. 울퉁불퉁 비틀어진 껍질을 감자칼로 깎아냈다. 윗둥을 잘라내며 살펴보니 하나는 속이 하얗다. 당근 속이 원래 하얀가? 갑자기 머릿속이 하얘졌다. 도마에 당근을 얹고 감자칼로 슥슥 깎았다. 도망가려는 당근을 붙잡아 이리저리 돌려가며 깎았다. 자투리 당근을 하나 먹어보니 맛이 이상했다. 이게 당근 맛이라고? 씁쓸하기도 하고 약간 신맛이 나는 것 같기도 했다. 단맛은 느껴지지 않았다. 당근 몇 개는 정말 바람이 들어서 구멍이 나 있었고, 속이 거무스름하게 변한 것도 있었다. 적당히 깎아내고 이상해보이는 부분은 미련 없이 버렸다.
채 썬 당근을 한 움큼 남겨놓고 나머지는 볼에 담아 굵은소금을 쳤다. 남겨놓은 당근은 점심식사용으로 바로 양념에 무쳐 빵과 함께 먹었다. 신맛이 강한 게 아무래도 상한 건가 싶었는데 레몬즙 때문일 거라 믿었다.
설거지를 하고 소금에 절여둔 당근을 하나 맛봤다. 아, 너무 짜다. 소금에 절이는 건 언제나 어렵다. 소금을 얼마나 넣어야 하는지 아무리 해도 감이 잡히지 않는다. 당근을 물에 헹궈내 면포에 싸서 물기를 닦아냈다. 올리브오일 세 큰술, 레몬즙 세 큰술, 홀그레인머스터드 한 큰술을 넣어 버무리려다가, 이 라페는 당근 맛으로 먹는 라페가 아니라는 걸 떠올렸다. 뭔가 특단의 조치가 필요했다. 레시피에는 후추를 조금 넣으라는데, 나는 허브를 넣기로 했다. 말린 바질과 파슬리가 있었다. 무엇이 더 어울릴까, 어떤 맛으로 이 문제를 해결할까. 기로에 서있었지만 오래 고민하지 않았다. 쌉싸름한 맛이 새콤한 맛과 어울릴 것 같아 파슬리를 넣기로 결정. 파슬리를 한 큰술 듬뿍 넣었다. 잘 버무려 밀폐용기에 담아 냉장고에 넣었다.
잠깐 쉬려고 컴퓨터를 켰다. 챗GPT에게 내 고민을 물어봤다. “나는 블로그를 개설하는데 AI 기술이 너무 좋아져서 이걸 누가 읽나 싶은 의구심이 들어. 또 내가 전문적인 일을 하는 사람도 아닌데 블로그를 할 수 있을까? 그래도 내가 좋아하는 건 이러이러한 게 있어.” 챗GPT는 놀랍게 친절했다. 내 친구가 나에게 이런 질문을 했다면 “그래, 그거 안돼. 그냥 다른 거 해”라고 했을 텐데 챗GPT는 내 성향이 다양한 관심사들을 연결 지을 수 있는 장점이 될 수 있다며 그게 블로그에선 강점이 될 수 있다고 조언했다. 얼마나 아느냐가 아니라 어떤 시선을 가지고 있느냐가 중요하다고. 그건 AI가 요약할 수 없는 것이라고 했다.
그래, 그렇다면 일단 계속 가는 거다. 챗GPT에게 블로그 제목을 추천해 달라고 했다. “요리하다 생각 많아짐”, “취미는 시도, 특기는 실패!”, “세상은 넓고 내가 해본 건 적고” 킥킥대며 웃다가 챗GPT가 날 놀리는 거란 생각이 들었다. 세상 어디에든 접속하고 무엇이든 다 알고 척척 만들어내는 챗GPT가 나라는 인간의 약점을 장점으로 승화시켰다고 인정해줘야 하나?
냉장고에 넣어둔 당근 라페를 꺼내 한 조각을 맛보았다. 차가운 식감 뒤에 짠맛이 훅 들어왔다. 요리할 때 참고한 레시피를 다시 확인했다. 당근 400g에 소금 1작은술. 나는 1큰술을 넣고 혹시나 싶어 더 넣었는데. 고수라면 이런 실패를 할 수 없다. 아까운 식재료를 몇 달 동안 방치하지도 않을 거다. 요리 실패담을 블로그에 쓰면 누가 읽어줄까? 레시피 북도 아니고 이걸 뭐라고 할 수 있을까? 어쨌든 글 하나를 쓰긴 했다.




🍓당근라페는 1주일째 잘 먹고 있다. 짠맛은 어떻게 할 수가 없어서 간을 하지 않은 샐러드와 빵과 함께 먹고 있다. 파슬리를 넣은건 사람마다 호불호가 있을 것 같다. 친구들에게 당근을 어떻게 '소진'하느냐 물었더니 '당근김밥', '당근김치', '찐 당근' 등 다양한 아이디어를 내어줬다. 모두들 "다음부터는 많이 사지 마"라는 말을 덧붙였다.
🍽️ 내가 따라한 레시피 :
https://wtable.co.kr/recipes/LcYSsnvDXiUju2J9EK1W2hPY
당근라페와 샌드위치 - 우리의식탁 | 레시피
평소에 당근을 익혀만 드셨다고요? 그렇다면 생당근을 이용한 당근라페를 만들어 보세요! 달달하고 아삭한 당근을 새콤달콤한 오일드레싱에 버무렸어요. 샐러드처럼 드셔도 OK! 샌드위치에 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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